6장.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
모든 인간은 신(神)을 인정합니다. 신(神) 존재를 거부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종교성은 인류의 보편적인 성향입니다(로마서 1:19-20). 16세기의 신학자 칼빈은 인류에게 있는 미신, 우상숭배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합니다. 20세기 로마 교회 신학자인 칼 라너는 무신론자도 신(神) 개념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무신론자도 신의 존재를 부정하여 결국은 유신론자가 됩니다.
인간이 동물들과 구별되는 독특성 중에 하나가 ‘신(神)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적 사고에서 신은 인간이 창안한 개념이라고 하고, 동물에게도 종교 의식이 있다고도 합니다. 어떠한 개념을 만들어도 인간은 신 의식에서 탈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신(神)을 부정하려고 해도 인류는 결코 신을 부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은 부단히 ‘신의 굴레’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피하지 못했습니다. 신을 떠나면 떠날수록 인간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형태로 갑니다. 인간은 공통체적 인간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독립적(자율) 인간을 지향하고 있는 모순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은 신을 부정하고 신을 떠나 자기 방법(자율)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런 인간 삶에서 오히려 비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압박을 받은 인간은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서 ‘다른 창조물’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가상의 신’도 아닌 ‘다른 대체수단’은 더 위험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신을 ‘공중권세 잡은 자’라고 합니다.
죄를 더할수록 더 강력한 악한 영적 권세가 나오는 것이 필연일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 방법은 ‘참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류는 ‘참 신을 섬기는 사람’과 ‘가상의 신을 이용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서’ 신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위해서’ 참 신을 섬겨야 합니다. ‘참 나’, 자아(自我)는 참 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길 때에 알 수 있습니다. 자기 근본이 무엇인지 화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근본을 알지 못하면서 자기를 찾는 행동은 사막에서 없는 바늘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 ‘참 신(神)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섬기다가 반역하여 본래 자리를 이탈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이탈한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가려 하기 때문에 노력하면 할수록 이탈하는 성향(반역의 성향)이 강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상태의 인간이 참 신을 섬길 수 없습니다(전적 부패). 혹 참 신을 섬기려는 욕망이 있어도 할 수 없습니다(전적 무능).
기독교는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참 신을 섬길 수 없다고 평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참 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구속주 하나님의 은혜, 곧 죄사함에서 시작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사도행전 16:34, 4:12). 그런데 죄사함을 받은 인간이어도 자연스럽게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를 갖고 있는 인간은 자연스럽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인 아담이 반역하고 부패했음에도 구원의 길을 주셨습니다(창세기 3:15).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직접 땅에 오셔서 아담의 죄를 구속하시고(4복음서), 자기를 믿는 인간의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사도행전 2장).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섬길 수 있습니다. 참 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의 입에서 예수 믿음을 고백하며, 거룩한 착함으로 이 땅에서 삽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비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이루고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